민란-이라 생각했고 조사과정에서 모든 민란을 다루기는 사실상 불가능했으므로, 가장 대표적인 민란 이였던 진주민란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아울러 우리가 살아가는 현시대의 사이버 시위와 민란을 비교 해보기로 하겠다.
Ⅰ.서론
현시대가 정보화 시대라는 것을 증명하듯이 우리나라에
3) 봉기
순조 11년 12월에 이르러 군사를 더욱 활발히 모집하였다. 그리하여 봉기군의 일선 졸병들은 이들 광산 노동자층으로 구성되었고 봉기군의 깃발을 그리기 위한 병풍수리공, 무기를 만들기 위한 대장장이 등여러 다양한 업종과 향임들도 참가하였다. 가산 박천 지방의 땅 없는 농민이나 품삯
민란을 진압하였다. 김창현 외 2인, 『고려 500년, 의문과 진실』 (김영사, 2001), 66쪽.
조위총의 난은 정치적 성향이 다분했던 조위총이라는 인물에 의해 반란이 시작되었지만, 진행과정에서 민란의 성격으로 변하였다. 조위총이 지휘자였다 하더라도 그 중심세력은 서북계 40여 성의 주민들이었기 때문
1. 조선후기 정치적상황과 삼정의 문란
1) 세도정치와 통치 질서의 와해
숙종 ․ 경종대에 나타나기 시작한 일당전제의 추세와 극심한 정쟁 등 붕당정치의 말기에 두드러졌던 현상은 영 ․ 정조의 탕평책과 강력한 왕권 아래에서 일당 억제했었지만 그 근본적인 해결책이 제시된 것은 아니었다. 따
1. 서론
실학이라는 용어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는 유학의 본령에 충실한 학풍(學風)’을 뜻하는 것으로서 시대에 따라 수기와 치인의 중점이 달랐다. 조선 후기의 실학파 제유(諸儒)도 그들 자신의 학문을 실학으로 자처한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 말의 원의(原義)가 그러하더라도 그것을
Ⅰ. 경상도 단성의 농민항쟁
철종 13년 2월에 진주민인들 수만 명이 하얀 수건을 머리에 썼으며 손에는 목봉을 잡고 진주목으로 들어가서 서리들의 집을 태웠다. 병사는 그들이 모여 있는 장시에 가서 그들을 해산시키려 했지만, 오히려 민인들의 재산을 함부로 거두어 들였다고 지목을 받았고, 이서
Ⅰ. 머리말
조선 후기, 즉 17-19세기에 이르러 한국사회에는 큰 변화가 일어나면서 중세사회를 지탱하던 구조가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사회적인 면에서 신분제의 동요, 신분제와 맞물려 중세사회의 물질적인 토대를 이루었던 경제 구조의 변화, 유학자들의 주자학적 사유방식에 대한 이반, 정치적인
1. 머리말
제주도를 어떤 이는 눈물과 한숨의 섬이라 하고 어떤 이는 하늘의 축복을 받은 섬이라고 한다. 어쨌거나 “사람을 낳으면 서울로 보내고 말을 낳으면 제주로 보내라.”는 속담까지 낳게 한 이 섬은 옛날에는 문명 생활과는 동떨어진, 말(馬)이나 자라기에 알맞은 척박한 곳으로 알려졌다.
Ⅰ. 1810년대의 조선사회
1810년대 조선사회는 농업, 수공업, 상업, 공업 등 모든 경제 분야에서 서서히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발생․발전하면서, 그 사회를 지탱해 왔던 봉건적 질서가 해체되는 시기였다. 봉건사회의 해체 과정은 모든 사회 부문에서 진행되었지만, 이를 가능케 한 기본적 동력은 1
Ⅰ. 개요
19세기 단성의 가장 큰 폐단은 환곡이었다. 경상도 내에서도 군위와 함께 환곡의 문제가 가장 큰 지역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는 무엇보다도 경제적 여건에 비해 환곡의 양이 상대적으로 많았기 때문에 비롯된 일이었다. 전국적인 還摠의 변화 추이를 보면 18세기에 지속적으로 늘어나던 환총